한마디 쏘아붙이지도 못하면서 - 10분 영화, 나부랭이

 진지하면 욕 먹기 십상이다. 진지함의 동의어는 더이상 사려깊음, 침착함, 신중함 따위가 아니다. 진지함은 고루함, 따분함, 존나 꼰대, 를 표상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가벼운 용례로, '새퀴~~ 존나 진지빠네!!' 정도가 있겠다. 물론 진지함 혹은 엄숙함에 가벼움으로 대항하는 것은 오래전 부터 있어 왔던 피지배층의 전략이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이 거대한 것, 대항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것을 자신의 눈높이로 낮추고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거대한 대상을 희화하고 가볍게 만들어 무력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도피라 부를 수 있지만 가볍게 처리된 무거운 대상의 부조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결국 도피지만 공격이다. 그러나 가벼움을 지향하고 심각한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현 정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대상을 풍자하고 조롱하려는 공격적 의지보단 대상을 외면하려는 회피적 성격이 강하다. 가벼워져 무거운 것에 애써 눈을 돌리려 한다. 

방송 pd를 꿈꾸는 비정규직 회사원 호찬은 매사에 진지하다. 열심히 묵묵히 하면 정규직이 될 거란 생각을 한다. 또한 방송사 pd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간신히 찾아온 정규직 기회를 낙하산 타고 온 여직원에게 빼앗기고, pd의 꿈도 만만찮다. 호찬은 이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웃는 법이 없다. 그런 호찬에게 직장 동료들은 'Why so serious?' 란다. 사내에서 벌어지는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한껏 심각한 호찬에게 직장 동료들이 건내는 말이다. 동료들 눈엔 진지한 호찬은 비호감이다. 그의 진지함이 자신의 비열과 무능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가벼운 웃음과 농담 뒤에 애써 숨기려 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호찬의 심각함 앞에서 들어나는게 부담스럽다. 그러나 직장 동료들에겐 강력한 믿음이 있다. '그래봐야 바뀌지 않는다' '어차피 똑같다' 라는 믿음. 이 믿음은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진지빠는 호찬을 병신으로 만드는 강력한 주문이다. 

김혜리 기자님의 글을 보고 영화를 반추해보니 아.. 참.. 내 이야기다 했던 장면이 있다. 
평론을 읽는 장점은 놓쳤던 장면에 새로운 의미의 숨결을 불어넣게 해주는 것 일테다. 

호찬에겐 동생이 하나 있다. 그는 미술 입시생이다. 그러나 백수인 아버지 휘화 가난한 환경 탓에 예술가의 꿈은 녹록치않다. 하여 동생은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할꺼란 말을 서슴치 않게 한다. 맹랑하고 조숙한데 어딘지 체념적인 슬픈 아이다. 정규직이라고 구라친 아들 빽 믿고 여기저기 돈을 끌어온 어리숙한 아버지의 행동에 '이렇게 된 건 다 아버지 탓이다!!' 란 막내의 필살기를 날리는 동생. 당연히 가출은 덤이다. 가출을 끝내고 돌아온 동생의 뒤통수에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호찬. 그러나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면 할 말이 없거나. 아니면 말을 할 자격이 되지 않거나.

말을 하는 이의 매무새가 (그것이 조언이라는 옷을 입은 형태가 되었을 때) 남루하다면 말의 옷태가 제대로 날 수 있을까? 농담처럼 위장한 조언을 즐겨하던 때가 있었으나 요샌 말을 아낀다. 말에 힘을 싣는 건 권위와 위치다. 상대를 개도하기 위해 던지는 말의 경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 이젠 입 속에서 웅엉거리던 말들이 상대에게 가기전 '내가 뭔데... 내가 뭐라고...' 에 막혀 갈 곳을 잃고만다. 상대에게 주는 공격적인 말은 다시 되돌아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호찬도 동생에게 뭔가 멋진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형이라는 권위에 기대 동생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처지는 말할 '자격없음'을 끝끝내 상기시킨다. '내가 뭔데... 내가 뭐라고...' 이제 말을 아끼기로 한다.  그러나 한 마디 쏘아붙이지도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건 많고 하고 싶은 말은 참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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