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이라나 뭐라나 2 - 고백 영화, 나부랭이





















'고백'을 보며 이 두영화가 떠올랐다. 어쩜 티저포스터마저 비슷하다. 폰트의 색깔. 그리고 인물들의 표정하나만을 디테일하게 잡아 보여주는 방식. 이 세영화 모두 포스터에 그려진 인물들의 표정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시'의 미자는 순진하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려 시를 배우나 현실의 모순이 자신의 일이 되어버리자 추구하던 순수함은 쉽게 깨어진다. 포스터 속 미자는 절망한듯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다. 다르덴 영화 '아들'의 포스터 속 아비는 아들을 죽인 소년을 곁눈질로 뒤돌아 보고 있다. 소년에 대한 그의 시선은 편치 않아 보인다. 소년이 계속 신경 쓰인다. 고백 속 여교사 유코는 자신의 복수에 당당해 보인다. 딸을 죽인 학생들을 자신의 손으로 단죄한 복수의 당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 들인다. 그녀의 눈은 관객을 향하고(쳐다보고) 있다. '날 비난 할 수 있는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재밌지 않는가? 비슷한 소재를 어떤 감독이 다루느냐에 따라 이렇게 영화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먼저 '시'는 다음에 길게 다루고 싶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설정이 뒤의 두 영화랑은 다르니 일단 접어두자.

다르덴의 '아들'은 길게 이어지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작은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세심한 연출이 돋보인다. 소년원에서 나온 소년들에게 목공일을 가르치는 올리비에. 그의 아들을 죽인 소년이 목공소에 일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다. 범죄를 저지렇다고 하기엔 너무어린 소년. 그를 용서하는게 가능할까? 올리비에는 어른스러움을 빙자하며 그를 용서하는 척 한다. 아직 어린 아이니까. 갱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솔직한 단 한번의 반응은 올리비에가 분노하고 있음을 복수하고 싶음을 보여준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면 밑에 숨어있던 폭발적인 그 감정을 소년에게 쏟아 붓는다. '소년을 죽이고 싶다.' 그러나 이내 툭툭 털고 일어선다. 소년은 도망치지 않고 올리비에를 따라 걷는다. 소년을 용서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용서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년을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아들'은 이 세상에 없다. 소년과 올리비에는 구원 받을 수 없다. 같이 살아가기로 결심할 뿐이다. 이 서슬퍼런 일상을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내는 다르덴의 시선은 섬뜩할 지경이다. 인물들에 착 달라붙어 호흡하나 놓치지 않고 심리를 묘사해내고 있다.

'고백'을 보자. 딸을 죽인 학생이 자신의 반의 학생인 '아들'과 거의 비슷한 설정. 그러나 유코는 그 아이들에게 대단원의 복수를 감행한다.  영화'아들'은 집요할 만큼 인물의 심리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아무런 음악없이 영화에 밀착해서 숨소리조차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고백'은 테크니션인 감독의 명성 답게 감각적인 화면과 세련된 음악을 자랑한다. 두 영화는 소재를 푸는 방식부터 영화적 기법까지 대척을 이룬다. '아들'은 관객의 입맛에 맛추어 본다면 도덕적인 결론으로 끝나기에 바른 영화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백'의 경우는 어떠한가? 딸을 잃은 여교사의 복수는 비윤리적이라 볼 수 있을까? 대단원의 구원과 용서로 영화가 끝나는 뻔한 플롯을 벗어난 것이 '고백'의 독특한 점이다. 사람들은 복수에서 오는 쾌감과 대리만족을 즐기지만, '고백'을 보고서는 불쾌해 한다. 이상한 이중 잣대인데 그 것이 가능한 것은 영화의 온도와 관계가 있다. 이 영화는 복수와 대의라는 단순한 명제를 오락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우리는 '아저씨'의 '아저씨'가 멋있다고 생각하듯이), 잘짜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관객들은 몰입하게 되고 현실의 당위를 가져가 대입하는 것이다.

딸을 죽인 학생 A,B는 이지메를 당하는 학생들이다. 학생 A,B는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다. A는 엄마의 관심을 받기위해 동물을 죽인다. B는 A가 자신을 무시하는게 싫고 그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함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여교사의 딸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법적으로 14살 이하라 처벌되진 않는다.

다들 찾아보자. 누구의 잘못 일까?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일까? A,B를 이지메한 학생들? 그들을 몰아세운 부모? 그들을 처벌할 수 없는 제도? 어떤 것도 원인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여교사는 딸을 죽인 직접적인 당사자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갖다댄다. 우리는 적어도 영화라는 가상 공간안에서는 정의가 승리하는 달콤한 환상을 원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시'의 미자 처럼 추악한 순간이 자신의 일이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행동 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여교사의 행동도 응당 그러해야한다는 도덕의 관념안에 가두어버리는 것도 일종의 관객들의 편협한 위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히려 앞서 말한 것 처럼 복수의 칼날이 문제의 근원이 아닌 그 부산물에 향한다는 것. 그럼으로 해서 그 소년들에게 변명의 기회마저 박탈한 것. 그런 접근법이 거슬릴 수는 있다고 본다. 학생 A,B는 교사 유코의 고백 뒤에 더 처절한 이지메를 당하게 되고, 학생 A는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하던 친구를, 학생 B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게 된다. 그들의 최초의 살인이 어린 아이들이 감당키 힘든 근원적인 문제들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면, 후의 살인에 원인은 유코 스스로 제공하는 것이다. 복수의 순환 법칙 속 하나의 공식으로써 유코가 존재하게 되며 영화의 도덕의식은 퇴화해버린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도덕적이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 예술이 도덕을 뛰어넘는다는 미학적인 측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들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악의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관객들에게 메세지를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선동을 당하는 것은 이미 선동을 당할 준비가 되어있기(내재되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피튀는 전쟁영화에서 폭력의 쾌감을 느끼기도, 반전의 교훈을 느끼기도 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 나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도 최소한의 안정망은 있다. 쇼킹한 결말을 희석시킬만한 장치들을 몇개 깔아 놓고 있다. 여교사가 소년 A,B에게 가한 복수가 진정 물리적인 폭력이었는지, 아니면 일명 플래시보 효과에 기댄 것이었는지가 불분명하다. 어쨋든 결론은 '복수성공'이지만 그녀 스스로 이야기하는 '인간 목숨의 무게'의 경중은 여교사의 선택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영화 마지막 장면과(스포일러라 삼가하겠음) 마지막 대사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또한 모성애에 대한 강박이 있던 학생A가 스스로 엄마를 살해하는 환상 (이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다.)을 마주 하는 것은 유코가 이야기한 갱생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 일 수 도 있다. 아이의 성장은 끊임없이 간섭되는 부모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학생 A와 B 모두 엄마를 살해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영화에서는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 이 균형이라는 것이 쉬운게 아니다. 예를 들어 성범죄자들을 화학적 거세하는 것에 논란이 많은데, 성범죄자들의 재범률을 봤을땐 거세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것은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고,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소년 A와B 그들이 갱생할 확률은 영화에서 그려진 바에 따르면 거의 없어 보인다. 어쩌면 죽어 마땅할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꼭 복수를 해야하는가? 미숙한 소년들인데? 결국 양자택일이다. 그들의 싹을 잘라버리건 용서를 하건. 그 양자택일을 여교사는 한 것일 뿐이다. 누군가는 반드시해야하는 선택을 말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반동은 결국 여교사 본인에게 돌아 올 것이다. 결국 복수는 후련함 뒤에 찝찝함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괜히 '아들'과 비교해 버려서 도덕이니 뭐니 글이 길어져 버렸다. 1편의 글에서 볼 수 있듯 나카시마 테츠야는 진하게 사골을 우려내는 감독이라기 보단, 베스킨 라빈스의 슈팅스타 같은 인물이다. 프레임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영상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과 중간중간 낡은 6mm 필름으로 포인트를 주고, 어둡게 묘사되는 공간의 유려함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시각적 즐거움을 한껏 선사한다. 재밌는건 전현 현실성없는 기법들을 차용하여, 영화를 찍는데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리얼리티를 발견한다. 고백의 경우도, 구성을 뒤죽박죽 썩어서 현실성을 떨어트려 놓는데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인 '도덕, 윤리' 이런 것 을 갖다댄다. 환타지 영화같은 것을 보고서 현실의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영화도 환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봐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빨리가고, 기분 더러운 녀석과의 술자리는 어쩌구니 없이 길게 느껴진다. 마음이 설레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면, 하늘도 나뭇잎도 더 새파랗게 보인다. 그렇듯 그의 과장법은 오히려 현실을 더욱 풍부하게 묘사하는 방법이다. 그의 다음 영화가 벌써 부터 기대된다.

<울 아부지 보다 불과 6살 어린데 감각은 20대 보다 우월하다.
가라오케에서도 엔카대신 일렉트로닉 팝재즈를 부를 것만 같다. 간지남~~>


덧글

  • 우유니 2011/03/31 00:46 # 답글

    저도 이거 보고싶었어요. 마츠코 정말 너무너무 좋았는데 그것보다 더 좋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어서. 여튼 영화를 보고 글을 볼까 글을 보고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일단 영화부터 보기로ㅋㅋㅋㅋ
  • 개짖는소리 2011/03/31 01:36 #

    네넹.. 500백년만에 내블로그에 사람이 단 댓글이네요..ㅋㅋ 아 영화 좋답니다.. 글쓴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새벽 5시에 쓴 글이라 별로 비추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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