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차림은 간소했고 답지 않게 말쑥했다. 날씨는 애꿎게도 쌀쌀했다.
영화 같은 걸 하고 살테니 정장 같은 걸 살 필요는 없다고 항변하곤 했는데, 엄마는 아들이 청바지 같은 걸 입고 졸업식에 가는게 영 못마땅 하다. 그래서 엄마는 예의와 격식에 관한 지루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정장을 하나 산다. 내 겉멋든 항변은 아부지가 정장 살 돈은 이미 주었다는 한마디에, 더 좋고 비싼 정장을 선택하는 비루한 위선으로 매조지된다. 한심하다. 첫 등교하던 날 촌스런 파마로 실추된 내 이미지를 이제라도 만회해 보겠단 일념으로 나비 넥타이 하나 목에 질끈 동여 매고 집을 나선다. 생각보다 날이 차다. 꽃을 들고 사진을 찍어야 더 예쁘다는 엄마의 미학적인 식견에, 어차피 곧 버릴텐데 뭐 하러 비싼 꽃을 사냐는 실용적인 대꾸를 하곤 그대로 강당으로 향한다. 늘 보던 녀석들이 축하를 건낸다. 나는 이게 과연 축하할 일이냐며 멋쩍게 한번 쏘아 붙인다. 녀석들은 한껏 폼을 잡고 서있다. 모두 시꺼먼 정장에 넥타이를 하나 두르고 있다. 내 나비 넥타이가 괜히 머쓱해진다. 여학우들은 연지곤지 찍은 것이 새신부 같다. 자주 봐왔던 얼굴이 아니다. 낯설다. 그리고 모두 비슷하다. 갓 입학을 할 때는 총천연색의 머리와 갖가지 치장으로 너무나 달라보이던 녀석들이 모두 비슷한 모양새로 강당에 앉아 있다. 그 때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면 지금은 '어른'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내일 부터는 모두 일종의 어른이다.
졸업식이라는 나름 특별한 행사에 사람들은 한껏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친하지도 않았던, 한편으론 증오했던 교수의 덕담이 귀에 박힌다. 나도 싱긋 웃으며 교수의 손을 잡는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당신 탓도 큽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교수님은 독심술이라도 쓰는지 '니들 인생은 너희들의 것이다. 니 인생을 책임져라' 이란다. 괜히 남탓하면서 평생 죄책감 느낄뻔 했다. 은사의 혜안에 감탄한다. 친하지도 않았던, 후배 녀석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어깨동무, 김치, 썩소 이런거에는 취미가 없는데... 평생 찍을 사진을 오늘 다 찍는구나 싶다. 돈 없다는 핑계로 술 한번 번번히 사준 적 없는 후배들에게 이제야말로 좋은 선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후배들은 재수없게도 자꾸 졸업을 '축하' 한단다. 나는 녀석들을 앉혀놓고 영화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의 고단함에 대해 한참 설교를 늘어놓고 싶어진다. 영화 많이 봐라, 술 많이 마시지 마라, 책 많이 봐라, 학점 관리 잘해라, 재능 없다 싶음 언능 취업 준비나 해라~~~~~!!!!!!!! 나는?? 당연히 그러지 못했다. 왜 내가 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후배들에게 내뱉으려 하는가? 꼰대라서 그렇다. 사실 후배들을 핑계로 나를 다잡거나 다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조차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남에게 강요하고, 경험을 무기 삼아 나보다 어린 사람을 훈계하는 것을 보고 꼰대라고 그런다. 나는 비슷한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내 한심함을 괜히 남에게 투영해 보려는 못된 심보가 두려워 서둘러 밖으로 나온다.
엄마와 나 단촐한 우리는 학교에서 사진을 찍는다. 매일 매일 봐왔던 익숙한 공간들이 낯설어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 졸업이라는 특별한 분위기가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 것이고, 둘째, 수많은 무리들이 학교 안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엄마와 함께라서다. 아들의 학교생활이 궁금한 엄마는 연방 질문을 늘어 놓는다. 나는 엄마에게 학교의 구석 구석을 소개 해준다. 아무 의미 없이 지나치던 건물들과 공간들이 설명되어지고, 추억되어지니 그 것들은 의미를 가지고 나에게 생경하게 다가온다. 너무나 익숙하던 것이 관심을 주니 기이하게도 낯설어 진다. 엄마는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일념으로 계속 아들을 사각 프레임 안에 가두어 넣는다. 괜히 좋은 카메라를 빌려와서는 안그래도 기계치면서 엉뚱한 앵글로 포커스도 맞지 않는 사진을 연신 찍어댄다. 엄마는 아부지도 못 오고 내가 친구들도 없이, 쓸쓸히 졸업식을 맞는 것이 불쌍해 보였나보다. 나는 길었던 대학생활에 대한 후회와 미련으로 이렇게 끝내는게 영 아쉽다. 이렇게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게 두렵다. 엄마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는다. 학교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다. 엄마는 내 마음을 잘 아는지 영원히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나를 가두어 놓는다. 시작하기 전, 그렇다고 완벽히 끝나지도 않은. 애매한 그 상태를 영원히 남긴다. 그러나 사진을 찍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똑같은 배경에 똑같은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인다. 사진만 남기면 되는 것 처럼 행동한다. 인생의 소중한 한 때, 그 때가 지나감을 가슴 깊이 소화하는게 아니라 사진 한 장만 남기면 그만 이라는 것 같다. 그 것은 단순한 기록에 불과하다. 공장에서 기성품을 찍어내듯 사진을 찍어 내고 인생의 찬란한 한 때를 찍어낸다. 모든 것이 의미 없이 재빨리 지나간다. 우리는 그 흐름을 인지하고 체화하기는 커녕 담아두기에도 급급하다. 나 또한 별 다르지 않다. 못내 아쉬워 상대를 조소하면서도 연신 사진을 찍는다. 학교를 서성 거린다. 사진만이라도 남기를 바라며 말이다.
배가 고파진 나는 엄마와 함께 인사동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엄마는 5만원짜리 코스를 시키려 한다. 당신은 몇 만원 짜리 옷을 살때도 손을 벌벌 떨면서 아들에겐 무조건 관대하다. 나는 2만원짜리 런치를 시킨다. 밥을 먹고 인사동을 하염없이 거닌다. 엄마는 인사동 공방에 관심을 가진다. 공방은 아기자기 하고 천연덕스럽다. 엄마는 누더기처럼 혹은 히피의 감성으로 천을 꼴라쥬한 목도리를 하나 사들고는 아이처럼 기뻐한다. 런치만큼의 돈을 지불한 엄마는 아들에게 못내 미안했던지 다른 물건을 하나 집어 내게 권한다. 나는 극구 사양한다. 엄마는 작지만 건실하게 게으르지만 여유롭게 사는 공방의 창작자들을 긍정한다.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냥 들린다. 북촌, 안국동 따위를 거닐며 마음이 차분 해진다. 졸업과 미래라는 거대한 담론에 들뜬 마음이 씻겨 내려 간다. 오길 잘했다 싶다. 다음에는 이런 곳으로 이사 와서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내 마음이 동한 것을 본 엄마는 당장 부동산으로 향한다. 물론 내가 제지 한다. 생각해 보니 엄마는 나에게 큰 것을 강요한 적이 없으셨다. 내 마음의 그늘을 절대 남기지 않으셨다. 정취 있는 동네에서 평생 기타나 치며 자족하며 살아도 엄마는 너른 품으로 나를 이해 할 것 같다. 아부지도 물론.. 자식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화려하진 않지만 건강한 삶에 대한 강한 긍정. 생각해 보면 나에겐 부담 같은건 애시당초 없었다. 나 혼자 끙끙. 쓸데없는 고민.
엄마를 보내고 동기들에게 전화를 한다. 당연히 어디선가 질펀한 술자리 벌어질 줄 알았는데, 다들 도서관 아니면 이미 집에 도착해서 쉬고 있단다. 나 혼자 유난을 떨었다는 생각에 쪽팔린다. 동기들은 졸업식도 그냥 지나가는 하루 쯤 이라 그냥 하던대로 살고 있는 듯 했다. 경계의 앞에서 온갖 공상과 잡념에 잠기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 사실 졸업 이런거 별거 아니다 라며 갖은 폼을 잡던 나야말로 가장 졸업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오바했던 것이다. 어찌저찌 동기들과 만나 생각했던 질펀한 술자리를 다행히 가졌다. 한껏 불콰해진 나는 자조섞인 농담을 쿨한 척 내뱉는다. 먼저 졸업을 했던 동기들은 내가 가찮은지 시덥잖은 소리 하지 말란다. 내가 하는 고민은 그냥 시덥잖은 어떤것. 먼저 졸업한 동기들은 앞선 경험을 무기 삼아 마구 휘둘러 대는데 뭐라 대꾸할 힘이 없다. 나는 그 잘난 경험도 그러니까 먼저 졸업하고 한량으로 지낸 것 마저 무기가 되는 그 현실 이란 놈을 잘 모른다. 타협도 타협할 대상이 있을 때나 하는 거다. 작은 모래알 같은 것도 손바닥 안에 없는데 아니 있데도 그냥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데 무엇이랑 어떤 놈이랑 타협이라는 것을 해야하나. 뭔가 대단 한 것을 한다고 보냈던 폼 잡으며 보냈던 6년이 서글퍼졌다. 축제 때 술 마시며 춤추는 대학생들 사이로 기자재를 옮기며 그들을 한심해하며 가졌던 묘한 오만이 역겨워진다. 대학 축제라도 즐길껄. 동아리 생활이라도 해볼껄. 지나고나니 후회가 남는다. 근데 이런 종류의 후회는 지나고 나서야만 할 수 있다. 그러라고 있는 종류의 후회다. 그런 셈법에 익숙했다. 항상. 역시 다시 몹시 불콰해진 나와 졸업한 동기들은 자조와 푸념의 축제를 한바탕 벌인다. 술자리는 지리하게 이어진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술자리를 해가 높이 떠오르는자 비로소 끝이 난다. 아침 햇살은 우리들 뒤에 긴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련을 남긴다.
그러고는 끝. 대학생 끝. 의미를 되새길 시간도 구체성에 대한 준비도 반성할 시간도 없이 떠밀려 갑자기 어른. 분명 어마어마 한 것을 끝내고 겪었는데 그냥 어제와 오늘. 대학생과 사회인. 지나간 시간은 큰 덩치로 한꺼번에 떠오른다. '하지 않은 것 했던 것' 이런 식으로. 나는 공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빠져 나오는데 또 한참 걸리겠지. 갑자기 어른이다.
- 2012/04/06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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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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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글이기 때문도 있고, 애당초 할머니에 대한 글을 (아무리 개인적인 공간이라지만) 블로그에 올린다는 것도 좀 그렇다. 단어 선택도 신중해진다. 추억에 대한 애도라고 하기엔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분노만이 가득했던 유년시절을 보냈고, 가족이라고 하기엔 난 할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가끔 술마시다 보면 '난 얼마나 불우한 삶을 살았나' 배틀이 벌어지곤 하는데 (철없는 청춘들의 불쾌한 안주 따위라 생각하시라) 이혼한 부모 밑에서 사는 녀석,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녀석 가지각색이다. 하물며 검은땅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다. 하여 내가 겪었던 할머니에 관한 기억들은 그들 앞에 명함도 못 내밀 미미한 것들이리라. 억지로 만들어낸 볼품 없는 변명 같은, 하소연 같은. 그러나 할머니.. 정확히 말해 할머니와 삼촌. 같이 살았던,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 부르며 살았던 치매 노인과 정신질환자가 나에게 어떤 자국을 남겼음에 분명하리라. 가족에 대한 글이란게 감정에 골몰하고 전착해서 쓰는 것이다 보니 과장하고 낑낑대며 땡깡부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러나 분명하게 밝혀두지만 현명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덕분에 누나와 나 우리는 그리 힘들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다. 이건 분명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약 1년이 되어간다. 여전히 멍청하게 잠을 자고 있던 내게 누나가 급하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언을 알렸다. '올게 왔구나' 급히 내려간 대구에선 어머니가 부슬부슬 떨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할머니를 보살펴온 어머니였다. 가장 원수같았던,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어머니는 부슬부슬 떨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살던 어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하던 아버지 집으로 시집을 왔다. 아버지는 정신질환자인 삼촌과 알콜에 빠져 살던 할머니를 부양하고 있었서인지 결혼 생각이 없었다. 딸래들은 시집을 가고, 어찌저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지나 어쨋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역시 시시콜콜.... 한 이야기. 어머니조차 워낙 가난하게 살았던지라 가난은 무섭지 않으셨단다. 무서웠던 것은 생계가 아니라 관계였다. 할머니는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이문구 소설에서나 나올만한 토속적인 혹은 무섭지만 정감가는 시어머니가 아니다. 할머니는 정신에 문제가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시집살이가 응당 그런것. 이문구 소설에서나 나올만한 무서운 시어머니쯤으로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갖은 모욕과 수모를 받으며 시집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약해졌다. 원래 모질지 못하고 착한 분이시라 몇 갑절 힘든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철저하게 괴롭혔고, 고운소리 한번 한적 없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신경쇄약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란, 여름에도 내복을 입을 만큼 몸이 약하고, 조금만 장시간 차를 타도 고열과 멀미에 몇 일을 움직이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도 잠을 설친만큼 예민한 그런 분이다. 이런 어머니의 나약한 모습 그 이미지는 모두는 아니겠지만 할머니에게 기인한 것이 크다. 나가서 생계를 꾸려야했던 아버지는 애당초 어머니의 힘이 되어주질 못했다. 철없던 우리와 할머니와 삼촌, 거기에 더해 (내막은 잘 모르지만) 할머니가 데려와 갑자기 얹혀살기 시작한 새할아버지까지 모두 어머니가 떠안은 짐이자 고민이었다. 지나고 나서 알게된거지만 할머니는 이미 치매가 진행 중이었다. 어머니는 그 것이 질환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치매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 뿐더러 할머니는 아직 젊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냥 그런 감내해야할 시집살이 쯤으로, 그러나 감당하기엔 너무나 모질게 힘들게 살아왔다.
그러나 내가 본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은 이와 다르다. 내가 어린시절부터 봐왔던 것은 악다구니쓰며 할머니에게 대들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신경쇄약은 신경질로 변했고, 이런 어머니의 맹공에 대응하던 할머니의 활력도 치매가 악화되면서 무용해졌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남에게 화를 내본 적, 싫은 소리 해본 적 없으신 분이다. 더운 여름 고생하는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 미안해 반드시 한손엔 과일이라도 하나 들고 집을 나서시는 분이다. 그런 어머니는 유독 할머니에게만은 불같이 달려들며 화를 낸다. 가끔은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할머니를 나무라는 어머니를 보고 의아했다. 순진하게도 너무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변한다. 할머니에게 모질게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고 말이다. 그러지 않고선 못 견디고 부러질 것 같다고. 그런 할머니를 나는 필연적으로 미워했다. 가장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가 싫어하는 존재. 내 기억에는 어머니에게 불호령을 치던 강한 할머니는 없다. 방한켠 쭈구려 앉아 하염없이 티비만 보는 낡은 모습만이 머리를 맴돈다. 덧붙여 할머니 방에서 풍겨나오던 역한 똥냄새. 꼭두새벽에 홀로 일어나 문을 두드리며 온 가족을 깨우는. 냄비를 태워 집에 불을 낼뻔하고, 내 지갑에 돈을 빼서 술을 사먹는. 할머니 문제로 가끔 역정을 내는 아버지와 냉랭해지는 공기들. 모습들. 내심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시는게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
어찌보면 할머니의 존재는 우리 가족에겐 죄의식에 다른 이름이었으리라. 가족 모두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모두가 편해질 거란 걸 알고 있지만 내색은 못한다. 실제로 할머니의 부재와 삼촌이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집 사정은 한결 윤택해졌다. 좁은 화장실을 온 가족이 쓸 필요가 없어졌으며, 왕래도 용이해졌고, 방문을 더이상 걸어 잠그지 않아도 되며,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상황도 없어졌다. 우리 모두가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꽁꽁 묶어두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만 대놓고 바란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가 우리 가족을 지배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죽음 앞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할머니를 염하는 순간에 마지막까지 죄송하다고 자기자신을 원망하지는 말아달라고 용서하라고 목 놓아 말했다. 나는 상상도 못할 그 애증의 시간들 그리고 증오와 죄책감이 범벅이 되어 뚝뚝 떨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치통으로 고생하셨고, 술도 일체 입에 대지 않으셨다. 말그대로 기력을 잃어버렸고 통증을 앓았다. 두분은 누나와 내가 서울을 올라가고 난 뒤에도 49일 동안 정성을 다해 제를 올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독한 죄책감을 떨쳐내려 노력하셨다. 실토하자면 나에겐 할머니가 죄책감으로 남아있진 않은 것 같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도 엎고 뉘이고 정을 붙였던건 가족 중에 유일하게 나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귀한 손자. 예쁜 자식. 인간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존엄마저 무너트리는 치매라는 질병을 앓으면서도 본능적으로 나를 사랑하셨던 할머니. 어렸을 때는 그런 할머니를 용돈주는 인물정도로 이용을 했고 사춘기 때는 철저히 할머니를 무시했다. 오히려 나에게서 정서적인 결함이나 결핍이 발견되면 그 탓을 할머니로 돌렸다. 막상 지금 글을 쓰며 내가 왜 할머니를 미워했나 생각을 떠올려보려 해도 막상 크게 떠오르진 않는다. 모든 풍파는 어머니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난 할머니의 존재를 불평 불만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저 내게 귀찮은 존재, 성가신 존재. 그리고 스스로의 비참함을 가볍게 해주는 왜곡된 투영의 대상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할머니의 삶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가장 사랑했던 손자에게 인간적인 대접조차 받지 못했던 삶.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한 약 20년의 세월들. 그 20년의 세월이 할머니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아니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치매가 질병이기 이전에 사회적인 문제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치매라는 것은 치매를 앓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노인과 사는 가족들도 얼마간의 고통을 같이 겪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크나큰 형벌이다. 치매를 앓는 노인은 인간적인 존엄을 뺏기게 되고 그를 부양하고 살게되는 가족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된다. 양자간의 큰 고통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그러니까 하루종일 티비만 보던 인간이 아니었던 할머니의 나머지 조각들. 그 조각들의 파편을 고모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당연한 사실을 마주하면서도 가끔은 당혹감을 느낀다. 이건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으로 풀이하려는 못된 이기심에 기인한다. 할머니에겐 없었을 것 같았던 할머니의 숙녀 시절의 이야기는 차라리 꿈결 같았다. 할머니도 누군가의 어미였으며 연인이었다. 방한켠에 앉아 티비만 보는 할머니가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인생의 전부라면 누군가에겐 어여쁜 연인으로 자상한 어머니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고모가 가지고 온 사진 한장을 보았다. 예쁘게 옷을 입고 설레는 마음과 홍조 띤 얼굴로 찍은 사진들, 그 미래를 하염없이 낙관하는 '여인' 으로써의 할머니는 생경했다. 사진 속 그 여인은 자신의 인생 말년에 치매에 걸려 손자의 냉대 따위를 받으며 쓸쓸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을 예상이나 했을까? 쓸쓸했다. 80년의 세월. 다시 밟아보지도 못한 고향을 북녘에 남겨 놓고 싸늘히 식은 할머니의 시신을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났다. 눈물 흘릴 자격이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복잡다단한줄 알았던 인생이라는 것이 근사한 줄 알았던 삶이라는 것이,치기 어린 내 눈엔 할머니가 흘리고간 세월의 흔적이 한줌의 주먹보다 작은 재 따위로 환원되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괜히 센치해져서는 인생무상 이라고 결이 나지 않는 것 따위를 머리 굴려 생각해 보았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경이감을 느끼고 숙연해진다. 말로 설명 되어지지 않는 모든 것 들은 따라서 숭고하다.
할머니는 무엇을 남겼을까? 시를 쓰는 큰 고모를 남겼고, 신실한 작은 고모를 남겼다. 자상하고 매력적인 나의 아버지를 남겼다. 고작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 매사에 삐딱한 나를 남겼다. 할머니는 우리의 기원이다. 뿌리이며 근원이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곤한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거기에 너무 빠져있던 나머지 어머니와 할머니의 관계에 대한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를 찍었다. 그리곤 보기 좋게 실패했다. 부족했던거다. 이해가 부족했던거다. 진정성이 부족했던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정이 부족했던거다.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선 인간에 대한 것을 영화로 만들어 봤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이 부족했던거다. 끝까지 나는 할머니를 어떤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한심할 정도로 밉다.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 그대신 되뇌이고 되뇌이며 사죄해야지. 그리고 사랑해야지.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쏙 빼닮은 큰 고모 시를 하나 싣는다. 고모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 퇴직하고, 시를 쓰신다. 내가 한때 동경하던 소박한 삶의 표상으로 김용택 시인을 떠올렸는데 사실 그런 삶이 멀리 있지 않았다. 고모가 낸 시집에는 구구절절한 어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풍요롭게 흐른다. 한 인간에 대해 시를 쓰고 창작을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다.
수짓밥 차려 주시던
내 어머닌
팔십 평생을 그렇게
사시었지요
적선의 비 뿌리시며
사랑으로 보여 주신
큰 그늘 아래서
자식들은
정신의 뿌리에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바르게 자라 주었지요
이따금
외로울 땐
외로움의 차로
슬프고 가슴 아플 땐
슬픔의 차 갈아타시면서
한잔 술로
외로움 삼키시고
두 잔술에
다니러 가신 옛집
거기에는
대궐 같은 넓은 집의
안주인으로
금송아지 마구간에서
음매~ 울음 울고 있고
아픔 주고 떠난 친구
해옥아~ 부르며
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의 손길 필요한
행복이 기다립니다.
- 2012/04/0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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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이 되어 언론 혹은 지면에서나 보았던 20대의 '방황과 고민' 따위를 단기 속성 코스로 체험하고 있다. 내 대학생활은 정신적 육체적 피곤함의 연속이었을지언정 온화했고 평온했다. 부모님이 부쳐주시는 돈, 학비, 따뜻한 방. 게다가 각종 알바로 인한 풍족한 용돈상황까지.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그 알량한 선민의식 따위가 내 사고를 지배했다. 그 것들은 일종의 울타리 구실을 해주었다. 울타리 안에서의 방황과 고민은 테두리에 대한 무의식적인 안도감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니까 난 아직 누군가의 보호안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곤 하는 것이다. 객기와 치기 반항들은 그 안전함 속에서 소인배처럼 이루어졌다.
그러다 막상 나를 안아주던 손들이 없어졌다. 관심도 없던 어학연수, 취업스펙, 학점 따위가 신경을 긁는다. 힘든 20대 흉내를 내볼 요량으로 싸이월드 같은 곳에 노출증적으로 글을 싸질러 보았지만, 사실 그닥 힘들진 않다. 문제는 그거다. 모든게 신경질적이다. 내 나이에 응당 그래야만하는 것들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안전한 손들이 사라지면 막연함이 실체화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무수히 많은 (그러나 확률은 지극히 낮아 보이는) 가능성들만 쏟아져 나온다. 게으른 사람은 제멋대로 뻗은 '길'들의 향연 앞에서 탐험하기 보단 신중함을 가장한 '정체'를 선택한다. 실패다.
과거를 셈해본다. 놓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음에 박힌다. 미래를 셈해본다. 아직 괜찮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합이 0이 되고 마는 이 지리한 셈을 의미없이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 곧 이 합은 마이너스가 될테다. 피타고라스가 살아있었다면 '인생은 덧셈 뺄셈이 아니다!!' 라고 내게 다그치기라도 했으련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꿀꺽 삼켜 소화시키고 새로운 위장으로 미래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붙들고 나주지 않는.. 뒤를 돌아보고 후회만 남기는 것 들을 말이다.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그 고개길에 야객 같던 일들을 말이다.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그 일로 인한 시나리오와 영화. 졸업. 벙어리 같았던 문 앞에서의 서성거림. 등등....
지루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과거에 대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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